#공감 詩/詩가 있는 공간

가을에는.....최영미

meeko 2009. 9. 9. 02:59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 

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


미칠 듯 그리울 때가 있다


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, 뭉게 구름도 아니다


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


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


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


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


뭉게 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


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


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


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


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


가을에는,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


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


엉금엉금, 그가 내 곁에 앉는다


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


사랑이 아니더라도,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